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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 개론 report - 윤선도의 생애와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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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2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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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공부가 익어서 의리를 꿰뚫게 되자 문장 또한 크게 진전되었다. 그러자 승정원(承政院)과 삼사(三司)와 관학(館學)에서는 이이첨의 뜻을 받들어, 윤선도가 어진 이들을 모함하고 역적 김제남(金悌男)의 옥사를 뒤집으려 한다면서 극론을 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 1519, 중종14) 이후 금서가 된 『소학(小學)』을 발견하여 읽고쓰기 나서는, “사람 되는 법이 다 여기 있다” 하고 여러 해를 반복하여 수백 번을 읽었다. 굳은 의지로 공부를 계속한 결과 20세(1606, 선조 39, 丙午) 때에는 승보시(陞補試)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고, 향시(鄕試)에도 합격하였다. 또한 의약(醫藥) ․ 복서(卜筮) ․ 지리(地理) 등에 관한 글들에도 두루 정통하게 되었다. 이에 윤선도는 대대로 녹을 먹는 집안에서 비록 벼슬없는 몸이지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 하여 그 유명한 『병진소(丙辰疏)』를 올렸던 것이다. 이듬해(26세, 1612, 광해 4, 壬子) 가을에는 진사에 급제하였다.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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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세(1608, 선조 41, 戊申) 되던 해 2월에는 선조(宣祖)가 승하하고 광해군(光海君)이 등극하였다. 그리하여 observe공 유기는 “나는 아들은 없으면서 효자를 얻었으니 내게는 한이 없노라”고 하였다.


국문학 개론 레포트 - 윤선도의 생애와 문학
윤선도(尹善道)의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그런데 종가에 혈통을 이을 이가 없어서 8세(1594, 선조 27, 甲午) 때 큰아버지인 observe공(觀察公) 유기(惟幾)의 양자로 들어가 해남 윤씨의 대종(大宗)을 잇게 되었다. 『자국도회주(自國島廻舟)』는 14세에 지은 첫 작품이다. 당시는 광해군(光海君)의 정치가 어지러워 예조 판서 이이첨(李爾瞻)이 권세를 잡고 마음대로 휘두르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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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렇게 해서 12월 23일, 윤선도는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고 그의 아버지 유기는 삭탈관직(削奪官職)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해 4월에는 양모(養母) 구씨(具氏)의 상(喪)을 당하였고 이듬해(23세, 1609, 광해 1, 己酉) 가을에는 생모(生母) 안씨(安氏)의 상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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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1월 9일, 가도사에게 지시하여 윤선도를 유배지(流配地)인 함경도(咸鏡道) 경원(慶源
11세(1597, 선조 30 丁酉) 때에는 산사(山寺)에 들어가 글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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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그는 이를 기뻐하지 않았으나 이윽고 윤의(倫義)와 종사(宗事)의 막중함을 생각하고는 양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였다. 그 내용은 대체로 정치의 권세가 아래로 옮아감으로써 임금의 형세가 위태롭게 되고, 민심과 풍속이 어그러졌으며, 인재 등용이 불공평하고, 과거에 부정이 있으니, 먼저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이이첨을 베고 다음으로 임금을 배반하고 나라를 저버린 유희분(柳希奮)과 박승종(朴承宗)등의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4세(1600, 선조 33, 庚子) 때부터는 한시 작품을 남기기 시작하였다. 25세(1611, 광해 3 辛亥) 되던 해 11월에는 서울에서 해남(海南)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장편 기행 한시 『남귀기행(南歸記行)』을 지었다. 윤선도에게 30세(1616, 광해 8, 丙辰) 되던 해는 인생의 일대 전환기에 해당된다된다. 그는 1687년(선조 20, 丁亥) 6월 21일에 한성부(漢城府) 연화방(蓮花坊), 곧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연지동에서 해남(海南) 윤씨(尹氏)의 명문,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惟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뜻은 과거의 구구함에 얽매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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